주위에 맞딱뜨려본 경험에 의하면, 자격지심이 심해져서 남을 질투하고, 공격하는 형태로 흑화된 사람은 주변의 지인들이 아무리 그 사실을 알려주더라도 절대 그걸 인정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감으로 자기도 모르게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나'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는다. 이 사람들은 그 괴리감의 근본적인 원인인 '부족한 나'를 끌어 올리는 대신 남을 끌어 내리는 형태로 괴리감을 해소하려 든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신과 비교의 대상이 되는 주변인을 공격하고 깎아 내림으로써 자신이 잘못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지금의 자신'과 '자신이 바라는 자신' 사이의 격차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그 사이에 무너지는 자존감을 부여잡는거다. 이런 사람들에겐 일종의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 기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옆에서 뭐라 해봐야 소용 없다. '현실의 나'를 정면으로 목도하고 '나'가 도달해 있는 위치를 객관화 시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만큼은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두려운 일이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라도 주변인들을 끌어내려야 스스로에게 합리화가 된다. 이렇게 자존감이 엉망인 상황에서 흑화된 사람들의 액션들은 일종의 마약같은 거다. 절대 놓을 수가 없다.
자격지심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힌 이가 주변에 생기면 답이 없다. 그 대상이 혹여 절대 잃기 싫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한동안 거리를 가지고 멀리 하는게 답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인간 관계 정리해 버리는게 낫다. 이들은 자격지심의 대상이 된 이가 자신의 자존감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별게 아니라면 '남'도 끊임없이 별게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 놔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이 도저히 정신적으로 끌어내려지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든 현실에서 피해를 줘서라도 끌어내리려 들게 된다. 자신보다 형편이 좋은 친구를 질투해서, 그 친구의 남편을 유혹해 가정을 무너뜨리려 하는, 결국에는 친구와 아이들마저 살해한 거여동 사건의 시작도 여기서부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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